21세기 산타의 어느 하루

이젠 아무도 저를 믿지 않아요.

어제는 아파트 단지 놀이터 벤치에 앉아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을 착한 아이를 찾고 있었지요. 딱 봐도 영악하게 생겨먹은 7살 남자아이가 4살배기 동생에게 “산타 같은 거 다 거짓말이다. 그거 다 엄마, 아빠가 선물 사주시는 거다.”라고 말하더군요. 그런데 4살배기 동생이 같잖다는 표정으로 “나도 알거든.”이라고 대답했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꼬맹이들 같으니라고. 너네는 탈락이야 이것들아. 괜히 쓸쓸해서 담배만 뻑뻑 피웠습니다.

아무래도 이 짓거릴 그만둬야겠다 싶어요. 옷이며 보따리며 모두 지저분하고 해졌어요. 누가 지원해주지도 않는 일을 100년 넘게 하다 보니 사실 좀 지치기도 합니다. 행색이 말이 아니다보니, 혹시라도 크리스마스 새벽에 들키기라도 하면 도둑으로 오해받기 십상이죠. 요즘은 새벽이라고 길거리에 사람들이 없는 것도 아니잖아요? 다들 어찌나 부어라, 마셔라 하는지… 일도 일이지만 제 몸도 좀 챙길 때가 된 것 같아요. 몇 주째 몸살이 떨어지질 않아 걱정입니다. 기침이 자꾸 나와서, 선물을 전해주기가 영 불편해요.

또 요즘 아이들은 구하기 어려운 선물만 바라는 바람에, 착한 아이인데도 아무것도 주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참, 못난 산타 할애비입니다. 어쩔 수가 없어요. 자본주의는 저 같은 영세업자에겐 가혹한 구조에요. 신상품은 어찌나 빨리 나오는지. 뭘 선물해달라고는 하는데 뭔지 알아야 구해다 주지. 세상이 변하는 걸 쫓아가기에, 난 너무 늙어버린 것 같아요. 그리고 무슨 한정판이니 하는 것들은, 정말이지 무력한 산타보단 돈 많은 부모들이 더 선물하기 편한 것이 사실이기도 하구요. 게다가 이젠 루돌프도 없어요. 애초에 루돌프가 끌어주는 썰매를 타고 돌아다닐 만한 도로도 없지요. 아니, 그보다도 루돌프는 벌써 아주 오래전에 로드킬 당했어요. 피가 낭자해서 빨간 코는 주목받지 않았지만, 저는 운 좋게 정신차려보니 국도 옆 풀숲이더라구요. 입이 조금 돌아간 것 말곤, 뭐 괜찮습니다.

루돌프도 없이 도보로 다닐 수는 없으니 중고로 봉고차라도, 아니면 다마스라도 살까했지만 저는 사실 운전면허증도 없거든요. 지하철 근처에서 구걸을 하며 어떻게 연명해오긴 했는데, 요즘은 가끔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어요. 노숙자 동생들에게는 정체를 고백했지만, 아무도 믿지는 않았어요. 미친 놈 보듯 하지 않으면 다행이었죠. 처음엔 좀 괘씸하더라구요. 그 동생 놈들도 몇십 년 전엔 내 선물 받고 신났던 기억이 있을 텐데 말이죠. 뭐, 그래도 비밀을 터놓은 것만으로도 마음이 가벼워지더군요.

산타는 믿음으로 존재하니까

아무튼 이러저러한 이유로, 계속 산타 노릇을 하기가 녹록치 않은 요즘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인 이유들보다도 진짜 제가 산타를 포기하고 싶게 만드는 것은, 아무도 저를 믿지 않는다는 사실이지요. 사실 산타라는 건, 있어서 믿는 게 아니라 믿어주었기 때문에 살아있는 존재거든요.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때 존재하는 산타는, 그저 노망난 노숙자에 불과하겠지요. 그런 생각을 하면 쓸쓸해요. 그래서 뒤늦게 담배도 배우게 되었지요.

아, 넋두리가 길었군요. 어제 말이죠, 그 놀이터에서 놀던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가고 난 뒤에도 저는 벤치에 남아 몇 개비 담배를 더 피우고 있었습니다. 마음은 공허한데 발이 너무 무겁더라구요. 그러고 있는데, 웬 젊은 커플이 저보다 쓸쓸한 얼굴로 놀이터에 오더니 나란히 그네에 앉는 겁니다. 노인네가 주책 떠는 것 같아 보일까 싶어 서둘러 일어나려는데, 남자가 불쑥, 한 마디 하더군요.

“헤어지자.”

저도 모르게 울컥했습니다. 크리스마스이브에도 누군가 이별을 고한다는 사실이 슬펐거든요. 저는 산타로서 일말의 책임감을 느끼면서, 일부러 어기적대며 대화를 더 엿들었습니다.

“왜냐고 묻지 말고, 헤어지자. 크리스마스이브에 이런 말해서 미안한데,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내버리면 또 헤어지기 애매해질 것 같아서.”

여자는 아무 말 없이 발끝만 보고 있었습니다. 세상에, 크리스마스가 일찍 헤어져야 할 이유가 되기도 하다니. 저는 제가 산타라는 사실이 원망스러웠어요. 남자는 여자의 대답을 기다리는 듯 잠시 바라보다가 벌떡 일어나서 제 갈 길을 가버렸습니다. 5시가 조금 넘어 어둑해지려는 놀이터는 꽤 추웠어요. 여자는 움직일 생각이 없어보였습니다. 저는 다섯 개비째 담배를 태우며 괜히 서성였습니다. 왜냐하면 어제는 크리스마스이브였고 저는 누가 뭐라 해도 산타니까요.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지만, 말씀 드렸다시피 저는 무능했지요.

이제 절대 안 믿어

“죽일 놈.. 사랑 같은 거 이제 절대 안 믿어.”

한 20분쯤 지났을 때 여자는 코를 훌쩍이면서 혼잣말을 했습니다. 아, 저는 그 때 도저히 견딜 수 없었어요. 그 여자의 처량함이나, 제 지리멸렬한 책임감 때문이 아니라 “이제 절대 안 믿어.” 라는 말 때문에요. 저도 믿음을 잃은 신세였잖아요. 하지만 산타를 믿지 않는다고 아이들이 크리스마스를 기다리지 않거나 선물을 기대하지 않지는 않거든요. 산타를 믿지 않는다고 크리스마스가 행복할 수 없는 건 아니거든요. 사랑을 믿지 않는다고 그 여자가 외롭지 않겠어요? 사랑을 하지 않는다고 그리움을 모르겠습니까?

사랑도 믿기 때문에 거기 있는 거라고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이브에 실연당한 젊은 여자에게 100살이 훌쩍 넘은 웬 노숙자가 그런 설교를 늘어놨다간 당장 경찰서 행이겠지요. 그래요, 노숙자냐 산타냐의 기로에 섰습니다. 아무래도 산타가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피던 담배를 발로 밟아 끄고, 조금이라도 냄새를 날려 보내려 옷을 탁탁 털었습니다. 산타 복장이긴 해도 너무 해지고 더러워서 그냥 어디 의류 수거함에서 주워 입은 꼴이었지요. 여자가 경계하거나 놀라지 않도록 적당히 거리를 조절하며,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갔어요. 인기척을 느꼈는지 여자가 고개를 들었습니다. 2미터쯤 앞에서, 저는 목소리를 가다듬고, 환하게 웃으며 외쳤습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어떻게 됐냐구요? 물론, 여자는 도망가듯 놀이터를 떠났지요. 물론, 제가 산타라는 것을 알지도, 믿지도 못했을 겁니다. 물론, 아무 소용없는 황당한 짓거리였습니다. 하지만 산타가 하는 일이 겨우 그런 것들인걸요. 황당하고 아름다운 일들. 누구나 간절히 바랐던 적이 있지만, 실제로 일어나선 안 되는 일들. 네, 믿고 싶지 않겠지만 저는 요즘 이렇게 산답니다. 올 겨울엔 한파가 유난히 더 심하네요.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