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다섯 소년

무한도전 토토가 3가 눈물바다를 이루며 감동의 막을 내렸다. 우리 부부는 나란히 앉아 TV를 보며 서로를 몰랐던 시절의 서로를 만났다. 작은 무릎담요를 어깨에 둘러매고 무릎을 감싼 자세로 점처럼 앉아 연신 감탄사를 내뱉는 아내 모습이 수줍었다. 이따금 울기도 하더라. 저 때만 해도 강타와 결혼할 줄 알았다고, 옅은 한숨으로 나를 바라보는 아내에게 발끈하며 호응을 맞춰주면서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나도 그땐 성유리랑 결혼할 줄 알았으니까. 10대의 나와 아내는 같은 추억을 공유하는 세대라는 사실이 제법 멋스럽게 느껴졌다.

오랜만에 단 둘이 어디론가 여행이라도 떠나 온 기분이었다. TV 선반 아래에는 아이들이 어질러 놓은 장난감이 널브러져 있고 싱크대에는 저녁 먹은 설거지가 여전한, 지극히 현실 공간. H.O.T의 공연이 시작됨과 동시에 그곳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환상의 보물창고로 변했다. 공기 가득 시절이 스며들어 영원히 그리워 마지않을 어린 추억으로 숨 쉬었다. 엄마가 옆에 없으면 5분을 못 넘기고 잠에서 깨 울며 보채던 젖먹이 둘째도 어쩐 일인지 프로그램 방영시간 내내 잠잠했다. 그 역시 비현실적이었다.

사진 <MBC>

심정을 대변했던 심벌, H.O.T

무도 토토가가 향수를 자극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지난 두 번의 토토가 때에도 우리 부부는 나란히 앉아 추억에 젖어들었다. 그건 낡은 이불이나 다락방 먼지에서 맡을 수 있는 냄새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H.O.T는 아련하고 포근한 느낌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단독 공연임에도 역대 토토가 최대 신청자를 불러 모은 인기에서 알 수 있듯 H.O.T는 그 시절 스타들 사이에서도 뭔가 더 특별한 아우라를 지니고 있었다. 아이돌 팬덤의 시초로서 선점효과 따위를 들어 설명하기에는 그 인기가 압도적이었다.

H.O.T의 존재감. 그 바탕은 단연 ‘노래’다. 노래가 좋아야 인기를 얻는 건 당연하니 그 점을 짚으려는 게 아니다. H.O.T는 노래에 시대정신을 담았고 속 시원히 10대를 대변했다. 물러서지 않는 분명한 ‘메시지’를 뱉었다. 때로는 절절한 호소였고 한 번씩 따끔한 일갈이었다. 사랑 일변도의 가요계에서 가장 민감한 팬층을 지닌 그룹이 소신을 굽히지 않는다는 건 고마운 일이었다.

나와 아내의 청소년기, 그 시절 억압으로 가득 찼던 학교 문화 속에서 곪아 터지던 10대의 속내를 여지없이 대변해주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메시지도 강렬했지만 H.O.T는 같은 연령대라는 점에서 한층 피부에 와 닿았다. 가사가 쉽고 직설적이란 것도 큰 몫을 했다.  H.O.T 이후, 아이돌 부흥기가 찾아왔지만 히트곡들 대다수가 이성간 사랑노래였다는 점에서 H.O.T의 존재는 더욱 차별화된다. 비주얼 요소만으로도 인기는 끌 수 있지만 시대정신을 지닌 아티스트는 한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이 된다. H.O.T는 남자팬도 무척 많았는데 이는 단순히 멋진 오빠들을 넘어 그들이 10대의 심정을 대변하는 심벌이었기 때문이다. SM의 기획과 전략이었겠지만 어쨌든 우리는 H.O.T 멤버들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을 내뱉을 수 있었다.

‘전사의 후예’

우선 토토가3 오프닝 곡이었던 ‘전사의 후예’는 학교폭력에 대한 곡이다. 10대 그룹의 데뷔곡으로는 쉽지 않은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과감히 10대인 그들의 가장 민감한 문제를 건드리면서 사회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전사의 후예’가 메시지를 풀어내는 방식은 꽤 세련되었다. 만일 학교폭력은 나빠요 하고 착하게만 말했다면 건전가요가 되어버렸을지도 모를 일. 이 곡은 폭력을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세세하게 상황과 심리를 묘사한다. 덕분에 직접 학교폭력을 당해보지 않았어도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간접 체험을 제공한다.

어쩌면 나를 찾고 있을 검은 구름 앞에 낱낱이 일러 일러봤자
안 돼 안 되리 안 돼 아무것도 내겐 도움이 안 돼

더불어 위와 같은 가사를 통해 학교에서 공공연히 일어나는 부조리를 가감 없이 지적하며 가해학생들 뿐 아니라 그들을 지도하는 어른들에게도 책임을 묻는다.

‘위 아 더 퓨쳐’와 ‘열맞춰’

‘위 아 더 퓨처’는 본격적으로 어른들에게 쌓인 불만을 터트리는 곡이다. 조금의 양보나 물러섬 없이 우리 스스로 세상에 설 수 있다고 외친다.

언제까지 우릴 자신들의 틀에  맞춰야만 직성이 풀리는지
하루 이틀 날이 갈수록 우린 지쳐 쓰러질 것 같아

오로지 대학만을 목표로 학교와 학원을 종일 오가며 공부기계로의 삶을 강요하는 부모에게 10대들이 항상 하고 싶었던 말. 특히, ‘집어 쳐’라는 랩 가사는 언제나 어른에게 예의 바르라 교육받은 10대들의 속을 시원하게 뚫어주었다. 이 노래는 H.O.T와 그들이 대변하고자 하는 팬들에게 완벽한 동질성을 심어준 곡이다. 나 역시 이 노래를 들으며 당돌한 반항심을 키웠고 중학교 때 학교 점심방송에서 ‘위 아더 퓨처’를 틀었다가 교감선생님께 불려 가 크게 혼이 난 적이 있다. 물론, 그 일로 고분고분해지기는커녕 전투력만 배로 상승했다. 얼마 후 굉장히 큰 볼륨으로 ‘교실이데아’를 틀고 방송반에서 퇴출되었다. 무도 토토가 3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열 맞춰’ 역시 억압에 짓눌린 10대의 심정을 절절히, 노골적으로 대변하는 곡이다.

‘행복’과 ‘빛’

H.O.T가 언제나 이처럼 거친 메시지만 던진 것은 아니다. 그저 시키는 대로 말 잘 듣는 순한 양이 되지 말자는 것뿐, 항상 꿈과 희망을 심어 주었다. ‘행복’이나 ‘빛’으로부터 건네받은 위로 덕에 더욱 건실한 삶을 살 수 있었다면 과장일까? 적어도 나는 그랬고 아내 역시 마찬가지라 했다. ‘다 함께 손을 잡고 하늘을 보자’는 말은 그 자체로는 뻔한 위로일지 몰라도 그동안 H.O.T가 열심히 우리 대신 어른들과 싸워주었기에, 우리 할 말 다 해주었기에 뻔하지 않게 다가왔다. 반항적이고 전투적인 H.O.T가 있었기에 따뜻하고 다정한 H.O.T가 더 감동을 전해줄 수 있던거다. 두려움에 울고 있는 눈물을 닦아주어 앞으로 열릴 나의 날들을 환하게 비춰줄 수 있는 빛이 된 형아들. 무작정 세상과 어긋하고 싶어 반항하는 10대는 없다. 단지, 조금 더 인간적인 대우를 받고 원하는 걸 할 수 있길 바랐을 뿐. 누군가 이야기를 들어주면 충분한데.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H.O.T의 위로였기에 더욱 큰 힘이 되었다.

‘늑대와 양’ 그리고 ‘아이야’

무도에서는 그 시절 10대들이 H.O.T를 통해 영어를 배웠다고 우스개를 던졌다. 한글로 영어 발음 다 적어가며 외웠던 게 실질 영어실력 향상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겠냐만 그만큼 여러 분야에 관심을 돌리게 만들었던 것만큼은 사실이다. 이는 10대들이 직면한 문제들 뿐 아니라 사회나 역사적 관심으로까지 일면 이어졌다

‘늑대와 양’ 역시 토토가 3에는 나오지 않지만 언급할만한 곡이다.  ‘2000년 6월 28일’이란 가사와 ‘갑갑해 50년의 평화는 그날, 퍽퍽 퍽퍽 모든 게 그 들 손에 부서졌어’라는 가사를 통해 6.25 전쟁을 노래한 곡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1950년 6월 28일은 북한 인민국에서 서울이 수복당한 날이기 때문이다. 학교 폭력에 대한 노래로부터 시작된 H.O.T의 메시지가 반전 메시지로까지 확장된 것.

다만, 아이러니한 것이 당시 ‘빌어먹을’이란 가사가 문제 되어 공중파 방송에 해당 파트 가사가 삭제된 채 방송되었다는 점이다. 꼰대들에 대한 반항으로 가득했던 그룹이라 해도 거대 기획사에 소속된 기획그룹이니만큼 자본주의 논리를 벗어날 순 없었을게다. 하지만 되려 나와 친구들은 이런 조치가 취해진 후에 ‘빌어먹을’이란 가사가 나오는 ‘늑대와 양’의 후렴구를 아무 때고 큰 소리로 부르고 다녔다. 어른들이 모인 자리에서라면 부러 더 그랬다. 인상을 찌푸리며 무슨 그런 천박한 노래를 하냐고 꾸짖는 어른들의 모습을 보면 희열마저 느꼈다. 마치 억압받는 민주투사라도 된 냥. 그게 우리들만의 싸움방식이었다.

‘아이야’는 H.O.T의 시대정신이 저항에서 머물지 않고 시대를 위로할 줄 아는 어른스럼으로 자라났음을 보여준 곡이다. 1999년 6월 30일 벌어진 수원시 화성군 씨랜드 화재 참사에서 유치원생 23명이 목숨을 잃었고, H.O.T는 ‘아이야’를 통해 참담한 심정을 전했다.

그래 우리가 만든 헌장대로 지켜진 게 뭐가 있는가?(없다 없다)

피우지도 못한 아이들의 불꽃을 꺼버리게 누가 허락했는가
언제까지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반복하고 살 텐가

이 노래는 언제 들어도 가슴이 아프다. 무엇보다 지금 대한민국에 대입해도 나아진 것이 없다는 현실에 더욱 참담할 뿐. 죄 없는 아이들의 생명을 앗아간 어른들의 부주의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는데, 그래서  ‘아이야’는 추모곡인 동시에 비판곡이다. ‘아이야’는 10대들이 뉴스 사회면에 관심을 가지게 하는 작은 계기가 되었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세상 일에 시선을 돌리는 10대들이 늘어났다.

억압의 시대를 버텨낼 수 있던 용기

이처럼 토토가3 공연곡을 중심으로 H.O.T의 노래 몇 곡을 짚어보았는데 주목할 점은 전부 타이틀이나 주요 곡이었다는 사실이다. 정규 앨범을 채우기 위한 수록곡이나 묻힌 좋은 곡 같은 게 아니란 거다. 10대를 주요 타깃으로 한 보이그룹이  무거운 주제의 메시지를 매번 메인 곡에 담는다는 건 대단한 행보였다.

토토가 3를 통해 떠오른 건 그저 흐뭇한 추억만이 아니다. 우리에겐 너무 힘들었던 어린 나날들. 수없이 흔들리고 다시 맘 붙들어 매며 이겨낸 10대 시절의 모든 감정들, 10대의 나날 전부. H.O.T는 그 억압의 시대를 함께 헤쳐 나온 동료다. H.O.T 덕에 부조리와 싸우고 우리의 권리를 조금씩 쟁취해 나갈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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